지난 편 내용 요약
버스 잘못 타서 길 잃음-부랴부랴 걸어서 가까스로 버스 다시 탐-또 걸어서 니코부치 도착함-사진 찍다 누오 도랑에 빠뜨림-물기 머금은 누오 잘 닦아서 품에 안고 하산함
<이노초 종이 박물관>
니코부치 다음으로 내가 버스를 타고 도착한 곳은 이노초 종이 박물관이었다. 박물관 구경하는 걸 좋아하기도 하고, 박물관 기념품점에서 누오 토사화지 편지책을 판다는 얘기를 전해들어 그것을 사가려는 목적도 있었다.
여러 이유 때문에 직원이 권유한 종이 만들기 체험은 못하고 돌아왔다. 체험에 한 시간 정도 걸린다는데 내가 박물관에 도착한 4시는 영업 종료까지 1시간이 남은 시점이었고, 이때 체험하면 박물관 구경을 못한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그런데 이건 직원이 나보다 잘 알 부분이었을 텐데 왜 체험을 권유했는지는 모르겠다. 체험 종료 시간이 박물관 관람 마감 시간보다 더 늦었던 걸까? 물론 그렇다고 해도 하진 않았을 거 같다. 이 시점의 나는 점심도 간식도 못 먹어서 시방 배고프고 얌전한 짐승 상태였기 때문이다. 안 건드리면 얌전하지만 자꾸 건드리면 눈 디비진다이.
박물관에는 짐을 무료로 맡길 수 있는 캐비닛(100엔 넣어야 하긴 하지만 열쇠 꽂으면 도로 튀어나온다)이 있어 누오와 가방은 캐비닛 안에 잠시 보관했다. 박물관 관람하면서 인형 품에 껴안고 있는 건 좀 이상하잖아. 누오를 보겠다는 일념으로 이 벽지에 혼자 온 나도 굉장히 이상하다는 건 부정하지 않지만, 거기서 더 이상해질 필요는 없지.
1/8
토사 화지는 한지와도 만드는 방법이 많이 닮아 있었다. 나무를 골라내고, 나무껍질을 벗기고, 그것을 뜨거운 물에 삶고, 니요도강의 깨끗한 물에 헹구고, 섬유를 잘 펼친 뒤, 평평하고도 얇게 떠내어 말리기. 그래서인지 원료에 따라 한지와 흡사한 감촉의 종이도 있었고, 그보다 까칠하거나 매끄러운 종이도 있었다.
토사 화지로 만들어진 물건과 관련 사료를 보는 것도 쏠쏠했지만 역시 나는 뭘 만드는 걸 보거나 직접 만드는 걸 좋아해서, 만드는 과정을 설명한 자료와 만들기에 쓰인 여러 도구들을 구경하는 게 가장 재미있었다. 실물 사이즈의 사람 모양 인형을 보고 놀라기도 했지만. 무지 리얼하더라.
그렇게 관람을 마치고 박물관 내 기념품점에서 누오 토사화지 편지책을 세 권 산 뒤, 니요도강의 모습을 담은 엽서 세트도 하나 샀다. 그 뒤 박물관에서 15분 정도 걸어 이노역으로 향한 뒤, 고치역 방면으로 가는 전철이 오기까지 나는 대합실에서 비상식량으로 챙겨온 것들을 우걱우걱 먹었다. 전날 이온몰에서 산 포켓몬 빵과 텀블러에 담아온 음료였다. 이미 이때 5시를 넘긴 시점이어서, 아침에 먹은 조식은 내려간 지 오래였는지라 빵과 음료수 맛은 아주 꿀맛이었다.
그래서 저녁 안 먹었냐고? 그럴 리가요. 호텔에 도착해서 쉴 틈도 없이 또 나는 저녁을 먹으러 뛰쳐나갔다. 아침에 나가서 저녁에 들어오고 또 어딜 바로 뛰쳐나가는 게 가능하다니, 회사를 다니는 동안 낡고 지쳐 있던 내 몸뚱아리는 사실 체력이 떨어진 게 아니라 현생에 염증이 난 건가 보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날 저녁도 히로메 시장에서 먹었다.
이날 저녁은 (또) 가츠오타다끼 메뉴가 포함된 고등어초밥 정식에 닭튀김이었다. 고치는 관광객들이 가츠오타다끼를 질리도록 먹고 가도록 작정한 동네인가 보다 했다. 하지만 고등어도 맛있다는 말도 사실이었다.
덧붙여 이노초 종이 박물관에서 산 편지책이 세 권인 것은, 하나는 홍보용, 하나는 소장용, 하나는 (가능하다면) 실제 사용 목적으로 샀기 때문이다. 표지에서 빵끗 웃고 있는 누오쨩 아이 귀여워.
이날도 하루종일 돌아다닌 탓에 워낙 고됐던지 씻고 머리를 대자마자 바로 잠들었다. 여행기 내내 걷고, 이동하고, 구경하고, 먹고, 자는 얘기만 하는구만. 뭐 그런 게 여행이란 거지만.
<고치성>
원래 고치성에 갈 계획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나는 자연 경관이나 자연적으로 잘 꾸며놓은 공간을 둘러보는 걸 더 좋아라 하는 편이고(지금 이 글도 여행기인지 내셔널 지오그래픽 다큐멘터리의 수기인지 나까지 헷갈릴 정도이니 말 다한 거 같다), 이날도 원래는 가츠라하마 해변과 현립 마키노 식물원에 갈 예정이었다.
그런 이유로 전날처럼 든든하게 먹은 아침. 와플에 마멀레이드, 버터를 같이 바르니 그 풍미가 아주 끝내줬다. 물론 다른 것들도 두말할 것 없이 맛있게 먹었고.
그러나 전날처럼 교통편을 이용하는 일정이 예상치 못한 곳에서 꼬인 탓에, 오전에 갈 예정이었던 가츠라하마 해변은 두어 시간 늦은 점심 때쯤에 도착해버렸다. 그래서 해변을 둘러본 이후에 가려고 한 마키노 식물원은 아쉽게도 가지 못하게 되었다.
고치성은 가츠라하마 해변에 가기 전, 버스를 놓쳐 갑작스레 생긴 여유 시간에 다녀왔다. 성은 생각보다 높았고… 생각보다 높은 지대에 있었다…. 끝없는 돌계단과 경사로와 고치성 내부의 계단이 나를 반겼고, 전날 삼만 보쯤 걸은 탓에 안 그래도 욱신거리던 허벅지가 불타서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살려줘.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관람은 나름 즐거웠다.
뭔가 익숙한 푸른색의 동그란 물체. 그렇다. 기념품 숍에서 우파 인형을 발견했다. 즐겁고 귀여운 경험이었다. 이미 이때는 전날 저 인형을 산 상태라서 저기서 또 사진 않았지만.
이외에도 신발을 안 벗고 내부로 들어갈 뻔하다 제지당하기도 하고(이 인간은 시야가 무지 좁다), 신발 보관함에 신발을 넣고 열쇠를 안 빼는 바람에 운이 나빴다면 신발을 도둑맞았을지도 모르는 위기를 넘기기도 했고, 총 6층계로 이루어진 고치성의 높고 좁은 계단을 큼직한 배낭을 멘 채로 낑낑거리며 오르내리기도 하고, 맨발로 그늘진 마룻바닥을 밟고 다닌다고 시린 발을 동동거리기도 하고. 즐거운 거 맞았냐고? 고통스러운 만큼 즐거웠다고 하자.
하지만 다리도 아프고, 가츠라하마로 가는 버스를 탈 시간도 그리 넉넉하지 않아서 그렇게 꼼꼼히 볼 여유는 없었던지라 깊게 인상에 남은 볼거리는 지금으로서는 별로 없는 게 아쉽다. 그래도 가츠라하마 해변에서는 이런저런 구경거리가 많았으니 그걸로 위안을 삼아도 괜찮겠지.
<가츠라하마 해변>
나는 고치성의 살인적인 계단을 뒤로하고 노면전차에 몸을 실었다. 노면전차를 타거나 본 횟수 자체가 그리 많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여태까지 누오로 랩핑된 노면전차는 타기는커녕 보지도 못했다는 게 아쉽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 아쉬움을 부스럭 털어내고 관광안내소에서 받은 버스 시간표로 확인한 가츠라하마행 버스 출발 시간보다 좀 이르게 승차장에 도착했다.
고치에서는 일반 정류소에 멈추는 버스는 정말 정시에 딱 맞춰 오고, 터미널 등지에서 대기했다가 탑승해야 하는 버스는 출발까지 3~5분 정도 남은 시점에 승차장에 정차한다. 지난 이틀 동안 고치에 머무르면서 얻은 소소한 깨달음이었다. 이번에도 그 귀납적 추론이 맞아떨어졌다는 것에 내심 뿌듯해하며 나는 가츠라하마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종점이 목적지인 건 편하구만. 그렇게 한 시간 정도가 지나니 가츠라하마의 바다가 눈앞에 펼쳐졌다.
그러나 점심시간을 이미 넘긴 나에게 더 중요한 것은 바다 구경보다 밥을 먹는 일이었다. 배고파. 근처에 식당이 몇 개 보였고, 나는 그중 라멘 가게에 들어가 버섯과 죽순과 숙주와 조개 등을 올린 맑은 육수에 말아낸 라멘에 사이드 고로케를 주문했다. 일본에 와서 현지 라멘을 먹어본 적이 아직 없었던 것이다.
라멘은 담백한 해산물 칼국수를 먹는 느낌이 들었다. 짭쪼름하고 옅은 구수함과 단맛이 배어나오는 육수. 으깬 감자를 튀겨낸 고로케도 바삭하고 부드럽게 입안에서 녹아내렸다. 마이유 버스 이용객인 것을 증명하면 유자 음료도 한 잔을 준다는 팜플렛이 식탁 언저리에 놓여 있어 티켓을 보여드리고 음료수도 한 잔 마셨다. 얼음이 들어 시원하고 새콤달콤하니 제법 맛이 좋았다.
그렇게 배를 채우고 가츠라하마 해변으로 향하자, 아직 주말을 맞이하지 않은 금요일 낮이어서 그런지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았다. 부드러운 갈색을 띤 모래는 발밑에서 바삭거리며 노래했고, 옅은 녹빛을 머금은 푸른 바다에서 일어난 하얀 물거품은 솨아아 소리와 함께 다시 바다로 녹아들었다. 그런 풍경을 구경하고 일부는 카메라에 옮겨 담으며, 나는 해변 끝에서 끝까지 천천히 걸었다.
해변을 가로질러 건넌 후 신발에 한가득 들어 있던 모래를 털어내고 나는 류오(龍王)곶으로 향했다. 또다시 계단을 마주했다. 별 수 없이 올랐다. 허벅지는 다시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렇게 긴 시간은 아니었다. 곧 곶의 정상에 도착하니 붉게 칠해진 작은 신사가 하나 있었다.
해신인 와다츠미를 모시는 신사라고 했다. 복채를 넣고 오미쿠지를 뽑는 것이 가능해서, 마침 딱 주머니에 남아 있던 100엔을 넣고 제비를 하나 뽑았다.
제비의 내용은 대길이었다. (tmi: 뽑은 직후에 찍은 사진은 바람에 흔들려서 글씨가 흐릿하게 나와 돌아오는 버스에서 새로 찍은 사진으로 대체했습니다)
서울까지는 약 700km가 떨어져 있는 곳이라는 걸 보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먼 곳까지 왔는데도 별탈 없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보고 싶었던 것들을 눈에 담을 수 있었으니, 오미쿠지에 나왔던 것처럼 운이 아마도 당분간은 계속될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마음 언저리에 남아 있던 불안과 걱정이 아까 바다에서 봤던 물거품처럼 잦아드는 것 같았다. 곶에서 주변을 내려다보고, 사진을 좀 더 찍은 뒤 나는 가벼워진 마음으로 계단을 내려올 수 있었다. 허벅지의 욱신거림도 더 이상 그다지 고통스럽지 않았다.
보고 싶었던 곳을 다 둘러보고 신발 속 모래를 한 차례 더 털어내고 나니, 돌아갈 때 타기로 한 버스 시간까지는 어느 정도 시간이 남았다. 기념품 가게에서는 무얼 파나 궁금해서 들어가 봤는데 그곳에서도 누오 미레 비스킷이 있었다. 그런데 정가보다 묘하게 비쌌다. 교통이 그리 좋은 곳이 아니어서 물류비가 추가로 붙었는지도. 어쨌든 나는 더 저렴한 가격에 비스킷을 구할 수 있는 곳을 알았기에 그곳에서 기념품을 사거나 하지는 않았다.
<숙소 복귀 후>
전날의 강행군에 이어 이날도 고치성과 가츠라하마에서 원 없이 걸었다 보니, 더 돌아다니다간 이튿날의 이동 스케줄을 생각하면 말도 못하게 생고생을 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이날은 바꾼 숙소(2일간은 넓은 방에서 묵었고 그 다음날은 그 옆의 1인용 객실에서 묵었다)에서 짐을 정리하고 침대에 엎어져 쉬며 머리를 비웠다.
그러다 문득 누오 노면전차의 운행 일정을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에 토사덴 교통 홈페이지를 들어가니, 운행 일정은 전화로 확인해야 한다는 안내가 나와 있었다. 실제로 대면해서 하는 얘기면 몰라도 전화 말귀가 좀 어두운 편인데. 누오 노면 전차의 운행 일정을 알 수 있을까요? 하고 말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그 뒤에 일어날 대화에 잘 대응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결국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 숙소에 있는 전화를 이용해 저질러버렸지만. 그때의 대화는 대강 이랬다.
나: (전화 통화 연결 시도)
직원: 여보세요, 토사덴 교통 전철 수송과입니다. 무슨 일로 전화하셨나요?
나: 안녕하세요, 누오 노면 전차의 운행 일정을 알고 싶어 전화드렸는데요.
직원: 혹시 지금 어디에 있으신지 알 수 있을까요?
나: 네? (긴장해서 맥락을 못 읽고 좀 버벅거림) 고치역 근처의 컴포트 호텔입니다.
[그리고 전화 소리가 작아서 정확히 못 들으셨는지 직원분께서 지금 있는 위치를 계속 물어보시고 김백경은 약간 더 멘붕했다]
직원: (어떻게 알아듣는 데 성공하심) 고치역 근처의 컴포트 호텔이요?
나: 네네.
직원: 아, 네. 고치역에서 출발하는 누오 전차는 오늘 밤(정확한 시간 까먹음)에 한 대가 있고, 내일은 오전 7시 18분경(기억에 의존하여 실제 시간과 몇 분 차이날 수 있음)에 첫 차가 출발합니다.
나: 아하,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이날 저녁은 고등어구이(전날 먹은 고등어정식은 뭔가 좀 아쉬운 느낌이어서 다른 식당에 가서 다시 시켜봤다)가 메인으로 나오는 일본 가정식에 닭튀김이었다. 남이 해준 밥을 배불리 먹고 남이 청소한 욕실에서 씻고 남이 정돈한 침대에서 뻗어 자는 삶. 너무나도 달콤했지만, 이제 내일을 마지막으로 이것도 끝이구나 하는 생각에 조금은 아쉬움이 남은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