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오의, 누오를 위한, 누오에 의한 여행 - 촬영회와 귀국 편

과연 처음 가는 해외 여행을 홀로 떠났던 김이소는 집에 안전히 돌아갔을까요? 보시면 압니다


지난 편 내용 요약

(2일차)이노초 종이 박물관 방문기-(3일차)가츠라하마 해변 가려다가 길 헤매서 원래 타려던 버스 놓치고 남는 시간에 고치성 다녀옴-가츠라하마 해변으로 이동-밥 먹고 해변 구경하고 류오곶 올라가서 새전 내고 오미쿠지 뽑음-대길 나와서 기부니가 조와짐-호텔로 돌아온 후 룸서비스용 전화를 이용해서 토사덴 교통 전철 수송과에 연락해 누오 노면전차의 운행일정을 알아냄

배불리 먹고 방에 오자마자 기절했다 눈을 떠보니 새벽 4시를 갓 넘긴 시점이었다. 그러고 보니 간밤에 목욕 못 하고 잤지. 비록 방은 좁아졌지만 욕실 넓이는 큰 차이가 없었던 건지 번듯한 욕조가 있었기에 몸을 푹 담근 채 편안하게 목욕을 즐길 수 있었다. 드디어 오늘이 여행 마지막 날이군. 

조식은 이날도 맛있었다. 3일 내내 아침밥 잘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 꾸벅. 보송보송해진 채 메모지에 인사와 작은 누오 그림을 남기고 나니 어느새 8시 30분이 지나 있었다. 펜으로 슥슥 그린 누오지만 좀 그럴싸해 보인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면 말고, 힝.

행사가 있는 공원까지는 걸어서 15분이 조금 더 걸렸다. 9시부터 30분까지 추첨권을 배부하니 조금 서둘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짐이 많아서 캐리어는 관광안내소에 맡기고 가야 하는데, 들렀다 가면 20분이 약간 넘게 걸리니까.

주머니 뒷면에 달라붙어 나 찾아봐라 하던 객실 카드키를 어찌저찌 찾아 반납하고 체크아웃을 마치려던 순간, 키오스크가 카운터에서 체크아웃하라면서 카드키를 퉤 뱉었다. 어이, 왜냐. 알고 보니 지불해야 할 추가 요금이 있었다. 전날 토사덴 교통에 전화하면서 쓴 요금.

요금은 30엔. 문제는 내게 동전이 없었다는 것이다. 지갑에서 천 엔을 꺼내 드리며 연신 스미마셍을 읊었다. 그러고 나니 어느새 시간은 9시가 되기 10분 전이었다. 아, 원래는 이 시간에 공원에 도착하려 했는데. 흑흑. 나는 묵직한 가방을 이고 그보다도 더 묵직한 캐리어를 열심히 끌며 관광안내소로 향했다.

관광안내소에는 누오 썬바이저가 저렇게 걸려 있다. 아침 일찍부터 누오를 보니 기분이가 좋았다. 게다가 길을 가면서 누오 노면전차도 봤다. 더더욱 기분이가 좋았다.

그렇게 오늘은 운이 좋을 거 같다는 느낌으로 룰루랄라 공원으로 이동했다. 나잇값 못하는 꼴을 글로 이렇게 적나라하게 까발리다니. 뭐, 오타쿠란 그런 법이니까 예쁘게 봐주세요. (ㅎ)

추첨권을 배부하는 부스는 꽤 한적했다. 내 앞에 줄을 선 사람이라곤 가족으로 보이는 3명밖에 없었으니까. 추첨권을 받을 사람은 거의 다 받은 모양이었다.

당첨 발표는 9시 45분. 공원에는 누오와의 촬영회를 준비하는 부스 이외에도 여러 부스가 있었다. 사실 누오와의 촬영회는 고치 료마 마라톤이라는 행사에 앞서 진행되는 작은 이벤트였기 때문에, 마라톤 행사와 관련해 상품을 파는 부스들이 대부분이었다. 아직 행사가 제대로 시작되기 전이라 부스 대부분이 준비중이었지만. 그래도 이곳저곳을 돌아보고, 누오와의 촬영회 때문에 보들누오를 데리고 온 어느 트위터리안 분과 마주쳐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앉아서 숨을 돌리다 보니 추첨 결과가 나오는 시간이 되었다.

결과는 당첨이었다. 할렐루야!!!(tmi: 이 사람은 무교입니다) 응모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오전에 몰린 모양새였지만, 본토인 일본에서도 고치까지 오는 여정이 워낙 험난한 탓인지 정확히 30팀이 오전에 응모했고, 전원이 이벤트 참여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사실 팀 단위 방문객의 경우 1인당 표 1장을 배부했기에 실제로는 30팀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걸 감안하면 누오의 인기에 비해 의외로 적은 인원이 온 것은 맞았으리라. 이런 상황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여행 일정을 연장한 거지만, 낙관적인 예측이 맞아떨어지는 건 언제나 기분 좋은 일이었다.

촬영회가 있는 11시까지 1시간 20분 정도의 시간이 비어 있었다. 나는 전날 가게가 문을 닫아 지인이 부탁한 술을 사지 못했기 때문에 그동안 문을 연 리큐르 스토어를 찾아보기로 했다. 가장 가까이 있는 상점을 차례대로 둘러봤는데, 어째 토요일 오전이어서 그런지 닫힌 곳이 많았다.

촬영회 시간이 슬슬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한 군데 더 찾아보고 없으면 그만둬야지 하고 생각하고 마지막 후보지를 방문했는데, 웬걸. 딱 그곳만 열려 있어서 술 구입에 성공했다. 술 구입한 것까지는 좋은데, 1.8리터와 720밀리리터짜리 술병의 무게에 더 고통받는 내 어깨의 존재가 문제였지만(배낭이 대략 3kg 넘게 무거워짐).

그리고 중력 두 배 체험을 병행하며 공원에 도착한 나는, 이곳저곳을 마구 누비느라 헝클어진 꼴을 조금 단정하게 다듬고 부스에서 받은 누오 디자인의 썬바이저를 쓴 뒤 촬영 대기줄 끄트머리에 합류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어디 누오쨩 안 보이나? 하면서 두리번거린 건 덤이다. 물론 누오쨩은 귀한 몸이기에 행사 전까지 모습을 보여주는 일은 없었다.

이왕 사진 찍는 김에 카메라로 찍어달라 할까 하고 고민하기도 했지만, 요즘 카메라는 인터페이스가 세세하게 달라서 말이지. 촬영 스태프 분께서 좀 오래된 카메라 구동에 익숙하지 않다거나 하면 그 때문에 다른 분들 시간을 더 빼앗는 셈이 되기에 화질이 다소 아쉬워도 폰카로 찍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고 폰을 넘겨드렸다.

그리고 기다리고 기다린, 대망의 촬영 시간. 나는 긴장된 발걸음으로 누오와 마주 섰다. 사진으로만 볼 땐 몰랐는데, 실제 누오의 크기인 1.4m에 맞춰 제작한 탈인형이어서 그런지 생각보다 키가 아담해서 생각했던 것보다도 너무나 귀여웠다. 포동포동하고, 보들보들하고, 아담하고, 요리 보고 조리 봐도 심각하게 귀여웠다.

탈인형 안쪽 분께선 시야가 좁아지신 탓인지, 조심스레 악수를 청하자 좀 늦게 반응하시는 느낌이었다. 물론 그건 그분의 잘못이 아니었다. 물론 내 잘못도 아니었다. 그저 서로가 처음이었던 만큼 합이 잘 안 맞았을 뿐. 그러나 그때는 그것을 모두 내 잘못으로 돌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제가 지금 누오님 거동이 불편하신 걸 깜빡하고 너무 성급하게 악수를 요청했습니다. 죽을 죄를 지었사옵니다. 거의 이런 느낌으로. 

어쨌든 그 엇갈림을 극복해서 누오와 악수도 하고, 누오쨩을 보러 한국에서 왔다는 이야기와, 누오쨩이 정말 귀엽다는 말을 전했다. 그도 그럴 게, 가만히만 있어도 너무 사랑스러웠다. 탈인형 전신은 촘촘하고 짧은 극세사 원단으로 되어 있어서 엷게 광택이 나면서도 부드러웠다. 누오를 만나러 오지 않았다면 이런 것도 미처 알 수 없었겠지. 여행을 준비한 나 자신을 마구 칭찬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사실 이미 마구 칭찬했다.

사진을 찍은 후에도 무대에서 누오가 팬서비스로 포토타임을 챙겨줘서 동영상을 남길 수 있었던 것도 참 행운이었다. 문제는 용량 제한 때문에 이곳에 원본 영상을 올릴 수 없다는 거지만. 어쨌든 정말이지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나니, 어느새 누오는 무대에서 퇴장해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제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직시했다. 그래, 공항 가야지. 그렇게 터덜터덜 고치역으로 향했다.

하지만 마침 고치역에서 출발하는 누오 노면전차가 눈앞에 짜잔 하고 나타났고, 공항에 가기 전에 여유 시간이 있었던 나는 잔돈을 털어 노면전차에 올라 안쪽 사진을 마구마구 찍었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운이 좋았고 정말 잘한 일이다. 

그렇게 무아지경으로 사진을 찍은 뒤 노면전차에서 내려 다시 고치역으로 걸어가니 배가 고팠다. 대강 12시 반쯤 된 시간이었다. 이놈의 배꼽시계는 왜 이렇게나 정확할까.

햄버그 스테이크 정식에 디저트 아이스크림과 팬 케이크. 누오를 맞은편에 앉혀놓고 밥을 먹으니 왠지 정말 십덕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맞다), 건너편의 누오가 "아부지, 밥 억수 많이 먹는다누." 하고 말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많이 먹는 것도 맞긴 하다). 뭐, 그래도 밥은 잘 먹었다.

이번에 공항까지 가는 경로는 이전에 고치로 온 경로와는 조금 달랐다. 그때는 리무진버스를 타고 유메타운에서 환승해서 고치역으로 왔지만, 이때는 4시까지 공항에 도착해야 해서 다른 경로로 가야 했다. 고치역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마루가메 고속버스 정류장에서 내린 뒤, 공항에서 운영하는 리무진버스를 타고 공항으로 가는 경로를 이용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여정은 이때부터 슬슬 위기로 빠지기 시작했다. 아까 심부름으로 샀던 작은 술병 하나가 충격을 받아 가방에서 깨지는 바람에 버스 탑승 시간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점에 부랴부랴 터진 일을 수습하고, 화장실에 가서 깨진 병이 담겨 있던 비닐봉지에 고인 술을 버려야 했고, 분리수거가 되는 쓰레기통을 찾아 깨진 술병을 버리고, 너덜해진 비닐봉지까지 처리해야 했던 것이다. 다행히 버스에 타기 전 이 모든 고행을 마무리했지만… 힘든 일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리무진버스로 환승할 정류장은 고속도로에 있었고, 정확한 정보도 부족한 것이 화근이었다. 환승할 정류장 위치가 다른 곳에 있는 줄 알고 큼직한 캐리어와 묵직한 가방을 이고진 채 험난한 계단을 오르는 헛고생을 한 것이다. 그래도 리무진버스가 오는 시간 전에 이 삽질을 끝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리무진버스가 도착하기로 한 시간인 3시 반이 되어도

버스가 오지 않았다.

리무진버스 도착 예정 시간으로부터 5분이 지나도

버스가 오지 않았다.

그로부터 7분이 지나고 10분이 지나고 3시 반보다 4시에 더 가까워진 시점에도

여전히 버스는 오지 않았다.

걱정에 휩싸인 채로 앱을 확인해 보니 버스는 이미 떠났다는 공허한 정보만이 떠올라 있을 뿐이었다. 버스가 안 왔는데 이미 떠났다니요?

그 문구를 본 순간부터 나는 빠르게 망상에 잠겨들었다. 내가 짐 들고 계단 오르락내리락하던 그 시점에 혹시 버스가 일찍 도착했다가, 아무도 없는 거 보고 그냥 바로 출발해버린 건가? 솔직히 버스가 거의 늘 제시간에 딱딱 오는 나라에서 10분 넘게 기다려도 올 버스가 안 온다는 건 그런 상황밖에 없을 것 같았다. 혼란에 빠진 나는 결국 비상금을 털어 택시를 타야겠다고 생각하고 Uber 앱을 깔아 택시를 호출하기 직전까지 갔다(덧붙여, 이때의 예상 요금은 1만 엔 가량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기적적으로 버스가 도착했다.

자그마한 버스였지만 그것은 내게 노아의 방주와도 다름없었다. 나는 으허허허헝 바스가 코나이데 마이고니 낫테시마운다 어쩌구 따위의 우는소리를 하며 버스에 올라탔다. 기사님은 내 꼴을 보고 상황의 심각성을 어느 정도 인지하셨던 것인지 미안하시다면서 짐 싣기를 도와주시고 바로 공항으로 출발하셨다. 덧붙여 이때가 내가 3박 4일간 일본어를 가장 유창하게 구사한 순간이었다. 역시 사람은 급하면 외국어가 트이나 보다.

그리고 간신히 4시 반이 되기 전, 아슬아슬하게 안정권인 시간에 공항에 도착해서 수하물을 부치려고 보니

새로이 현실을 인식한 나는 어처구니 없음-황당함-분노라는 감정의 삼단 스펙트럼 위를 순식간에 질주하고 고통과 허탈함에 몸부림쳤다. 나는 대체 무엇을 위해 그토록 마음고생을…!

하지만 나는 정신적 스트레스에 제법 강한 편이다. 점심 먹은 지도 제법 시간이 지났고, 마침 우동으로 유명한 카가와니까 우동이나 한 사발 먹으면서 머리를 식히자고 5초 만에 결론을 낸 뒤 곧장 공항 내 우동 가게로 향했다.

카가와의 우동이 맛있다는 명성은 익히 들었지만 주문할 때 크게 기대하진 않았다. 뭐든 소문은 사실보다 과장되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기대감이 별로 없었던 것과 별개로, 우동은 소문대로 꽤 맛있었다. 밀가루 면인데도 쌀떡처럼 찰기가 있고 탱글하고 쫀득한 느낌이 나는 것이, 다소 부드러우면서도 좀 툭툭 끊어지는 느낌이 있는, 흔히 접할 수 있는 우동 면과는 느낌이 다른 것이 신기했다.

우동 한 사발 먹고 뇌도 우동면처럼 됐는지, 공항에서 대기하다가 또 지갑을 흘리고 방송을 들은 뒤 공항 직원에게 안내를 받고 경찰과 대면해서 신분을 확인하고 돌려받은 건, 이 여행에서 우리가 마지막으로 비밀로 부쳐야 할 이야기다. 어째 얼레벌레 굴어버린 횟수가 여러 번인데 첫 해외 여행, 그것도 혼자 벽지로 떠난 주제에 무사히 돌아온 건 기적일지도.

비가 추적추적 내렸고 이미 날은 저물어 창 너머로 내려다본 풍경은 흐릿했다. 하지만 무사히 돌아왔으면 그걸로 된 것 아닌가. 덧붙여 이날 공항 리무진버스를 타고 집에 오니 자정이 코앞이었고, 잔뜩 피로가 쌓였던 나는 짐을 간신히 적당히 수습한 후 기절하듯 잠드는 것으로 여행을 완전히 마무리했다.

그래서 요약하자면, 아주 즐거운 여행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여행기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남겨도 되겠지.

다녀왔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