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백경입니다.
말투에서 느끼신 분들도 계시지만 저는 프문의 행보에 대해 아직도 화가 사라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화를 가라앉힐 수 있다고 해서 화가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요. 보이지 않는 것과 없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기에. 그렇게 화가 난 상태면 입을 다무는 것이 보통이지만, 그럼에도 저는 지금 입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입을 여는 이유는 다들 짐작하거나 확신하고 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사상과 양심의 자유가 너무나도 당연하게 주어지는 이 나라에서, 양심에 따랐다는 이유로, 누군가의 심기를 거슬렀다고, 부당함의 희생양이 되고 만 그분의 편이 되어드리고 싶었습니다.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 위에서, 균형을 잡으려면 불리한 쪽의 편을 드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기에.
그리고 그분의 인권을 침해하는 일방적 폭력을 가한 이에게, 그것을 그저 보고만 있어야 했던 이들에게, 스스로를 돌아보고 참회하여 더 나은 길을 갈 수 있도록 하고 싶었던 까닭입니다. 제게 그런 힘이 있을지는 사실 잘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한편으로는 감정에 휘둘려 할 말을 정확히 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고 싶진 않았기에 입장 표명이 다소 늦어졌습니다. 하지만 늦는 것이 영영 하지 않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고 생각하여, 생각 끝에 이 글을 올립니다.
그래서 저는 이 글에서 먼저, 하루아침 아니… 불과 세 시간 사이에 일방적인 전화로 통보하는 부당해고라는 방식으로 이 일을 덮어버리고자 했던 프로젝트 문이 어떤 회사인지 알리고자 합니다.
이곳이 과연 어떤 회사였고, 어떤 행보를 보였기에 그 굳건하던 팬들마저도 하루아침 사이에 등을 돌리게 된 것인지.
이 사태를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하여, 이상적인 결말까진 아니더라도 많은 이들이 이성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결말을 내는 데 힘을 보태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저는 우선 다루어져야만 하는 것을 말할 것입니다.
도시를 위시한 IP를 바탕으로, 프로젝트 문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
그것을 옴니버스 시리즈로 이어지는 세 게임의 스토리와 주제의식을 핵심만 짚어 말해 보겠습니다. 지금까지 드러낸 맥락과는 다소 이질적인, 문학적인 표현으로 느껴질 수도 있는 글귀가 포함되어 있으므로 표현이 부담스러우신 분들은 핵심만 이해해 주셔도 감사하겠습니다.
1. 로보토미 코퍼레이션Lobotomy Corporation
: 전두엽 절제술 사(社)
특이점이라는 이름의 기술들로 지나치게 발전하고 만 까닭에, 중요한 것을 하찮은 것으로 간주해 너무나도 쉽게 날려버리는 오버테크놀로지 사회가 있었다. 미지의 것에 대한 공포로 인해 잊히고 만 미덕을 직면하고 그를 되살려 미래로 나아가고자 한, 어느 누군가로부터 시작된 태초의 이야기.
수많은 죄를 지어온 이가 단 한 번의 선을 행했다면, 그 수많은 죄가 단 한 번의 선을 위한 것이었다면, 그는 용서받을 수 있는가? 그 죄는 용서될 수 있는가?
반대로, 줄곧 선하게 살아온 이가 단 한 번의 악을 행했다면, 원치 않았음에도 악의 형태로 드러났다면, 그는 용서받아야 하는가? 용서해서는 안 되는가?
그 죄인이 당신이라면, 혹은 당신이 아니라면 당신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미덕을 얻은, 혹은 얻고자 노력하는 이만이 그에 대한 실마리를 얻을지니.
2. 라이브러리 오브 루이나Library of Ruina
: 폐허의 도서관(폐허 위에 세워진 도서관)
그 태초의 노력은 헛된 것이었을까? 당신, 혹은 그를 비롯한 이들의 노력은 폐허로 돌아갔고, 폐허 위에는 어느 날 도서관이 세워졌다. 정확히는, 폐허를 양분 삼아 도서관이 세워졌다.
그곳에 손님을 초대하고 접대하여 미덕을 깨우치려 한 도서관장, 그리고 그에 얽힌 한 남자의 이야기.
인간은 인간만이 이해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인간이란 것은 무엇인가?
복수는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인가? 가해자는 영영 가해자이며, 피해자는 영영 피해자인가?
가해자와 피해자는 서로 이해할 수 있는가? 가해자가 이해를 바란다면, 피해자는 받아들일 수 있는가? 받아들여야 하는가?
받아들여야 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피해자는 피해를 명분으로 상대의 목숨, 혹은 그 이상의 것을 빼앗을 수 있는가? 빼앗아도 괜찮은가?
미덕을 깨우친 이들만이 그것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답을 내놓을 수 있을지니.
3. 림버스 컴퍼니Limbus Company
: 가장자리의 회사, 변옥의 회사
지옥과도 같은 세상. 그곳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과연 깨끗한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심연을 들여다보면 심연도 당신을 들여다본다. 이를테면, 근묵자흑近墨者黑.
한편 지옥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대개 두 가지 선택을 한다. 악마가 되거나, 악인이 되거나. 하지만 누군가는 그것을 발판삼아 선인이 될 가능성을 품고 있다.
그러나 그 가능성의 길로 성공적으로 나아갔다고 하여, 그들이 과거에 지은 죄까지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죽음을 통한 회피가 원천차단된 상황에서 자신의 죄악을 마주하며, 죄악을 비롯한 자신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나아가 끝내 스스로를 구원하게 될 이들.
죄를 지었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더럽혀졌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어떻게 죄책감과 자책감을 벗어나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가?
미덕을 깨달은 자여, 해답은 바로 앞에 있으니.
세 작품의 연관성은 이렇게나 확고하고 명료합니다.
죄와 미덕이라는 소재를 바탕으로 한, 인간다움에 대한 성찰과 반성. 미덕을 가벼이 여기고, 인간다움을 저버린 이들이 맞이하는 참혹한 결말.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전하고자 한 프로젝트 문에게 저는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여러분은 대체 왜 여러분이 늘 이야기해 오던 그 미덕을 스스로 저버린 것입니까? 무엇 때문에?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답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는 여러분이 그에 대한 답을 할 차례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프로젝트 문에 직접 편지를 써서 전한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을 존중했기에 팬으로서 예의를 지키고자, 여러분이 소중히 하던 그 소통의 미덕을 잃지 않고자 그 편지를 몇 번이나 고쳐 쓰고 진심으로 여러분을 생각하는 분들과 몇 번이나 상의를 거쳤습니다.
물론 이때는 건의와 응원의 뜻을 보내는 것이 목적이었으므로 답이 오기를 바라고 편지를 쓰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요청합니다. 여러분의 진심을 보여주세요.
해당 편지는 현 시점에서는 의미를 잃었다고 생각하여 전문을 공개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섯 장이나 되는 장문의 편지이므로 읽어보실 분만 읽어주시는 것도 괜찮을 거라 생각합니다.
저는 프로젝트 문을 믿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제가 어리석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누군가에게 그다지 기대를 거는 성미의 사람이 못 됩니다. 그 편이 마음이 편하거든요.
그럼에도 프로젝트 문을 믿고 말았다는, 여태와 다른 행보를 걸었기에 여태와 다른 불편한 마음을 갖게 된 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 팬덤 내에서도 그런 분들이 적잖을 겁니다.
그렇다면 프로젝트 문은 저뿐만이 아닌 그 모든 팬을 실망시키는 선택을 했다는 말이 됩니다. 그리고 해당 일러스트레이터를 자르고 입장문을 올리기까지 불과 반나절이 걸렸으면서, 이제는 만 하루가 다 지나가도록 그 어떠한 해명의 의사도, 번복이나 철회의 의사도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이 침묵의 시간을 향후 대응을 생각하는 데 썼더라면 많은 것이 달라졌을 겁니다.
하지만 이미 일은 벌어졌고, 외신에서도 부정적인 언성이 높아지고 있네요.
신속함과 성급함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프로젝트 문이라는 게임사는, 시야가 어둡고 좁아진 상태였음에도 그것을 인지하지 못했고 그 상황에서 눈이 밝아지기를 기다리지도 못했습니다. 즉, 성급하고 어리석은 실책을 저질렀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이제 주변이 좀 보이나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요.
하지만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늘 이야기했듯이, 세상에 완전히 깨끗한 것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실수도 잘못도 하지 않는 이들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말합니다.
잘못을 인정하고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것을 비롯한 그 모든 과오를 거두고, 해당 일러스트레이터를 복직시킨 후 진심을 담아 사의를 표하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두고두고 참회하고 속죄하십시오.
저는 어렵거나 무리한 요구를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만약 그러한 요구로 생각되었다면, 이 글은 여러분이 마련했고, 팬들이 넓힌 이 판에서 제가 마지막으로 쓰는 글이 될 것입니다.
한편, 프로젝트 문과 공식적으로 관계되지 않았음에도 긴 글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도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 덕분에 더 넓은 세상을 보았고, 한낱 글러 주제에 분에 넘칠 정도로 애정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저를 행복하게 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인연이 된다면 어디선가 또 만나겠지요. 그 어떤 희박한 가능성이라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으니. 그러나 희박한 가능성에 목을 매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별로 없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그저 모두가 만족스러운 삶을 사시기를, 미약하지만 한 치 거짓도 없는 참된 마음을 까맣고 하얀 흐름 속에 담아 보내겠습니다.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