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포스팅은 이전 시리즈 글에 이어, 마찬가지로 이상의 집의 요청에 흔쾌히 응해 주신 권영민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님의 인터뷰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이분 또한 난해하기 짝이 없다고 알려져 있던 이상 문학 연구에 매진하심으로써 문학사상 주간 『이상 텍스트 연구』, 『이상 문학의 비밀 13』 등 다수의 연구서를 집필하시고 (출판사 민음사 한정으로, 그분이 저술하신 다른 책들은 위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이상 문학을 감상하거나 분석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큰 도움을 주셨습니다.
그분께 도움을 받은 것은 저 또한 마찬가지로, 이 글이 올라올 수 있었던 이유도 이분의 인터뷰 덕분입니다. 이전 편에 이어, 이상 문학을 감상하시고자 하는 분들께 이 포스팅의 내용과 그분의 마음이 부디 잘 전달될 수 있길 바라겠습니다.
주의사항: 이번 글은 주제 특성상 그림과 사진 자료가 포함되어 있지 않으므로 읽기에 힘드실 수 있습니다. 빨리 읽으시지 않아도 괜찮으니 천천히, 정확히 읽으시는 쪽을 부디 추천해 드립니다.
이전 편에서는 시를 중심으로 이상의 작품을 해석하는 방법을 살펴보았다. 이번 편에서 나는 권영민 교수님의 인터뷰 영상 내용을 바탕으로, 이상의 소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정리하고자 한다.
이상은 다들 알다시피 1910년에 태어나, 1937년 27세가 채 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살아가면서 남긴 의미 있는 자취를 살피면 그가 남긴 문학 작품이 그러한 발자취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 하지만 이상은 소학교 시절부터 화가가 꿈이었으며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에 입학해서도 그가 바란 것은 당대 조선 최고의 화가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미술을 포기하고 문학의 길로 들어섰으며, 그 과정은 상당히 흥미롭다. 그가 폐결핵으로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되는 상황에 빠지고 그러한 절망적인 상태에서 글쓰기를 선택한 것이다. 그는 "죽을 수도 없고 제대로 살 수도 없는 게 내 운명이다."라고 말했고 "그 운명에 대한 복수를 나는 꿈꾼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복수의 칼은 "내가 가질 수 있는 마지막 무기는 펜밖에 없다."라는 점에서 그 정체를 추론할 수 있다. '펜'은 그가 가질 수 있는 마지막 무기로, 펜은 곧 글쓰기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그가 생의 마지막 단계에서 선택한 것은 문학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단서인 것이다. 이상이 남긴 문학 작품은 사실 그리 많지 않다(옮긴이 주:권영민 교수님은 이상 문학을 모두 수집하고 정리하여 전집 4권으로 추려내었으며 이는 위에서 언급한 도서 편람에서 확인 가능하다). 일본어와 국문으로 쓰인 이상의 시는 약 80편 가량이며, 완벽하게 소설적 결구의 형식을 갖춘 소설 작품이 13편이다. 한편 우리말 산문체로 써낸 수필은 약 30여 편이다. 그 양이 그리 많지는 않다는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내 경험도 약간 보태 보자면 나는 내가 한때 가장 좋아했던 작품(게임)에 대한 해석을 정립하고 대략 1개월 반 정도만에 약 30개 정도의 글을 써냈다. 이 템포를 꾸준히 유지하면 100편 정도는 반 년 안에도 충분히 써낼 수 있는 분량이라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일본 말로 기록된 노트에 남겨진 메모와 같은 글 30여 편까지 포함해도 그렇게 글을 많이 쓰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는 화가가 되기 위해 그림을 그렸다. 그래서 그의 손으로 그려졌고 그 뒤 사진으로 남겨진 그림, 삽화, 도안 등을 추려 보면 이 또한 30점 정도 된다.
즉 그는 그가 일생을 살면서 쭉 품어온 소망과는 다르게, 미술품보다는 문학 작품을 더 많이 남겼다. 사실 그가 남긴 대부분이 문학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상을 천재 시인이자 작가로 명명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만큼 이상의 문학은 대한민국 근현대 문학사에서 가지는 의의와 의미가 크다.
우리는 이제부터 이상이 써낸 13편의 작품에서 드러난 이상 문학의 일반적인 특징을 살펴볼 것이다. 그의 작품이 지닌 개성이 다른 작가들과 무엇이 다르며 어떻게 구별될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13편이라는 수만 보더라도, 우리는 이상이 소설을 사실 몇 편 쓰지 않았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것은 그가 실제로 소설을 쓴 시간이 채 몇 년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1930년에 단 한 편의 장편 소설을 발표했으며, 1931년부터 36년 사이에 나머지 단편 소설들을 썼다. 그 중에서도 집중적으로 국문으로 된 소설을 발표한 것은 35년부터 36년 사이이다.
그런데 그 단편들이 매우 흥미롭기 그지없다. 장편보다는 그가 남긴 단편 가운데에서 우리는 『날개』,『동해』 ,『지주회시』,『봉별기』, 『종생기』, 『단발』, 『환시기』 같은 익숙한 작품들의 제목을 찾을 수 있다. 그 단편 소설들은 겨우 13편밖에 되지 않음에도 한국 문학사상 가장 많은 논란거리를 제공했다. 많은 연구자들이 이상이 쓴 소설의 특성을 설명하기 위해 달려들었고 다양한 해석을 거기에 붙였다.
그런데 그 연구 논문들을 보면 하나같이 공통점이 있다. 이상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즉 남성 주인공을 이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많이 보였다는 것이다.
『날개』의 주인공도, 『동해』의 주인공도, 『봉별기』와 『종생기』의 주인공도… 이 모든 작품의 주인공이 작가 이상 자신을 작품 속에서 표상했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수많은 연구자들이 작품을 연구했다.
하지만 그들이 놓친 것이 있다. 소설이 지니는 독특한 형식, 구조, 그 미적인 특성을 기반으로 이상 문학을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상이라는 작가의 일생과 관련된 에피소드를 자꾸 소설과 연결시켜서 설명하려 했다. 경험적인 현실의 영역에 허구적인 소설의 영역을 일대일로 대응시켜서 설명하려고 하는 시도들이 굉장히 많았다. 그리고 이는 이상의 소설을 숱하게 왜곡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본질적 속성을 잘못 이해하도록 독자들을 오도해버린 것이다.
기존의 소설을 이해하는 분석적 방법들 또는 그러한 방법으로 읽히는 방식의 소설을 사실주의(리얼리즘), 그리고 사실주의 문학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상 소설의 특징은 그런 원리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원리로 감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은 한국문학을 끌어올리려 했다. 그가 살아가던 1930년대에 쓰인 서양문학과 비슷한 감각으로 읽어내려갈 수 있을 정도의 감성과 기법을 드러내고자 하는 정신을 바탕으로 말이다.
그러나 연구자들이나 독자들은 여전히 19세기적인 관점으로 그의 작품을 이해하려 하고, 이는 결국 소설의 본질에 접근하지 못하게 되는 단초를 그들 스스로가 제공하는 계기가 되었다. 쉽게 말해 이상에 대해 제대로 알아보려 하지 않고 자신이 익히 아는 대로 해석하려는 시도로 인해 무덤을 파게 됐다는 뜻이다.
따라서 지금부터 말할 이상의 소설에서 몇 가지 중요한 특징을 견주어 보면, 그런 난관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이 글을 읽는 이들은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기존의 소설적 독법으로 보지 말고, 새로운 관점으로 읽어 주기를 바란다.
이상 소설이 가진 일반적인 특징 몇 가지 중 하나는, 이상 소설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나'라는 것이다. 1인칭 시점을 표방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는 이 '나'라는 인물이 자신을 이상이라고 직접 명명한 경우도 있다. 소설 『동해』가 그러하다. 그러면 이 글을 읽는 독자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그렇다. 독자는 이건 작가의 이야기구나 하고 속아넘어가게 되고, 곧이곧대로 작가와 인물을 연결하게 된다. 이게 바로 함정이다. 이상은 그저 작품 속에서 '나'라는 개인을 그려냈을 뿐, 그 개인의 생활상에서 그가 관심을 기울이는 부분은 관계가 아니다. 이상은 그가 외부 세계의 사람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리고 그것은 주인공 또한 마찬가지이다. 주인공은 외톨이로 누군가와 교류하려 들지 않고, 방구석에 혼자 누워만 있을 뿐이다. 딱 한 사람, 그가 관계성을 인지하고 있는 이는 오직 그의 아내 한 사람뿐이다. 이상은 현실세계와 고립되고 단절된 그런 개인들을 그려내었던 것이다.
이상 소설은 당대 리얼리즘 소설과는 다소 특이하게도 주관적인 삶의 세계를 주로 그려냈다. 그 주인공이 머릿속으로 떠올리는 생각, 그리고 혼자서 고민하는 내면의식. 다시 말해 정신세계를 더 많이 그려냈다는 것이다.
그 당시 다른 소설들은 외부적 현실, 식민지 현실, 노동자들의 삶, 지식인들의 좌절… 1920년대부터 30년대까지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전면으로 다루는 소설과 이상의 소설은 궤가 다르다. (사견 한 마디를 첨언한다면 이러한 리얼리즘을 작품 속에 극도로 잘 녹여낸 작가는 현진건이 있다. 『운수 좋은 날』과 『술 권하는 사회』 두 작품을 떠올려 보시길 바란다. 내용이 기억나지 않거나 내용을 모르겠다면 읽어보시는 편을 권해 드린다)
이상 소설의 주인공은 사회적인 관계 없이 고립되어 있고,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만 고민하고, 아무 사회의식도 없고 시대정신도 없는 인물처럼 보인다. 이상은 일부러 그런 인물을 그려낸 것이다. 객관적 현실 세계도 삶의 현장도 아닌, 나의 세계와 내면과 의식을 보여주는 주관적인 세계를 그리는 것이 문학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상 소설의 내용은 다른 작가의 작품과는 확실하게 구별되는 측면이 있었다는 것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이상의 소설은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닌, 주관적으로 바라보는 세계를 그리려 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물론 이게 자기 마음대로 세상을 보았다는 것은 아니다. 이제는 그 주관성이 어떤 근거를 바탕으로 나타났는지 알아보도록 하겠다.
이상의 주관성의 근거는 한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바로 '일상성'이다.
이상이 남긴 단편소설들은 모두 흥미롭게도 모든 이야기가 하루 동안에 일어난 이야기로 되어 있다. 『날개』를 빼고 전부. 아주 짧고 간단한 하루로, 도시인들의 일상을 그대로 말해주는 것이다. 역사적 현실 인식도 없이, 사회적 변화도 인식하지 못하고 흘러가고 반복되는 일상 중의 하루. 지난 번 포스팅에서도 언급한, 1일 순환이라고 하는 하루 동안의 얘기를 한다. 여러 날이 이어지는 『날개』 를 보면 이어지는 날들도 결국 비슷한 얘기가 반복된다.
그럼 그는 왜 이렇게 하루 동안에 있었던 일로 소설을 지어낸 것인가? 우리는 그것을 일상의 발견이라 이야기할 수 있다. 이상의 소설은 역사적인 현실이나 거대한 사회적 변화가 아니라 주관적인 개개인의 일상을 그려낸다. 현실성과 사회성은 일부러 배제하고 일상성만 남긴 것이다. 소설 내용으로 넘어오면서 우리는 비로소 반복되는 삶의 리듬과 매일같이 반복되는 아주 지루한 일상을 발견한다. 그리고 이것이 현대인의 삶에서 굉장히 중요한 문제성을 가지는 영역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모든 인간이 역사적 변화와 새로운 사회적 발전이라는 흐름 속에서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이들은 소수고, 대부분의 개인들은 비슷한 하루를 반복적으로 살아가고 거기서 늘 벗어나고 싶어한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일상의 노예가 되고, 그 속에서 함몰된 채 살아간다.
그리고 이러한 일상성의 문제는, 한국 소설에서 이상을 통해 최초로 문제적 지점으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것이 바로 이상의 소설이 갖는 문학사적 의의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그 다음으로 특기할 사항은, 작품에서 드러나는 그 일상의 무대가 시골이나 자연 풍경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의 작품은 전부 메마른 도시의 뒷골목을 무대로 삼고 있다. 1920년대부터 30년대 소설은 시골, 그 중에서도 농촌이 배경인 경우가 많다. (이상과 절친한 친구였던 김유정이 지은 것으로 널리 알려진 『동백꽃』, 『봄봄』또한 그러한 무대를 배경으로 사건이 진행된다) 다른 작가들의 작품 또한 부분적으로만 1920년대~30년대 경성의 모습이 드러난다.
그런데 이상의 소설은 농촌이나 자연을 배경으로 삼는 작품이 하나도 없다. 단 하나도. 전부 도시 이야기로만 이루어져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당대 조선 사회가 도회적으로 변모하며, 삶의 방식 또한 상당 부분 바뀌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1930년대의 경성은 식민지 조선의 중심지였다. 20년대 중반 이후 대대적으로 도시를 개발했으며, 교통이 확장되고 인구가 모여들면서 근대적인 도시로 변모했다. 도시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들은 그런 한국인들의 새로운 삶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상은 저것을 자기 소설 속에 끌어들였다. 이것이 바로 그의 소설에서 굉장히 중요한 문제가 된다. 이상의 소설이 개별적인 주인공, '나'의 주관적인 세계가 중심이 되는 소설로, 일상적이고 반복되는 생활이 중심이 되는 소설로, 자연과 농촌을 배경으로 하지 않고 도회지를 무대로 진행되는 소설로 확립된 것은 바로 그러한 시대의 흐름을 따른 결과물이다. 이로 인해 이상 소설은 철저하게 도시 문학으로의 정체성을 확보하게 된다. 이러한 도시적인 속성이야말로 이상 소설만이 지닌 면모였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앞서 말한 이 세 가지 요소가 이상의 소설에서 찾아볼 수 있는 외견상의 중요한 특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서사의 소재는 남녀 사이의 애정 관계에서 일어나는 갈등 문제가 주축을 이룬다. 하지만 서사의 본질을 고려하면 아까 언급한 세 가지 요소가 이상 소설을 읽을 때 기본적으로 알고 넘어가야 할 요소인 것이다. 『날개』,『동해』 ,『지주회시』,『봉별기』, 『종생기』… 이 소설들은 모두, 도시의 젊은이들이 느끼는 삶의 고뇌와 갈등을 서사의 핵심으로 삼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길 바란다.
한편 개별적인 작품에서 이상이 즐겨 쓴 소설적 기법은 어떻게 다른 작가의 소설들과 구별될 수 있었는가? 그것이 뭘 말하는가?
우리는 이상의 소설을 읽어 보면 아주 흥미로운 것을 찾을 수 있다. 작중 화자(서술자)는 소설 속에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사람을 말한다. 그리고 여기서 '나'는 주인공이면서도 작중 화자이다.
그는 늘 소설 첫머리에 등장하면 지금부터 여러분 내가 소설 하나를 들려 드릴 텐데 그 얘기를 이 장면에서부터 시작할 겁니다, 이렇게 마치 우리에게 말을 건네듯이 이야기를 시작한다.
소설 『날개』에서도 머릿말처럼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하고 시작하여 그 뒤의 문장으로 이어지는 맥락에서도 우리는 그것을 읽을 수 있다. "이런 때 연애까지가 유쾌하오." 지금부터 내가 이야기를 하나 지어내 보려는데 그건 아주 흥미로운 연애 얘기입니다, 이런 식으로 독자에게 말을 거는 것이다. 즉 연애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연애라는 것이 좀 특이한 연애다. 여왕벌과 벌집 사회를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여왕벌은 자신이 중심이 되어 자신의 자매인 일벌 외에도, 종족 번식을 위한 수벌을 거느리고 산다. 참고로 수벌은 번식 이외의 활동은 하지 않는다. 평소에 놀고먹고 빈둥거리다가 짝짓기를 하고 나면 벌집에서 쫓겨나거나 죽는 것이 그의 삶의 전부이다. 그리고 날개의 작중 화자는 지금부터 한 번 들어보라며 여성에게 기대어 사는 못난 사내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것이 바로 『날개』의 도입부다.
『동해』에서도 그렇다. 아침에 주인공이 일어나서 비슷한 말을 한다. 이런 장면, 이런 정경을 앞에 배치하면 어떨까요? 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이런 장면은 또 어떻겠소? 하며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소설을 이끌어가는 작중 화자가 이야기의 방향과 전개될 내용에 대한 암시를 계속 흘려주면서 독자들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종생기』는 이상이 거의 생의 막바지에 발표한 소설이다.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인 최국보가 지은 한시 「소년행」의 한 구절을 일부러 잘못 써 놓은 대목이 눈에 띈다. 한시의 원 구절은 유극산호편이라 적혀 있는데, 이상은 그걸 극유산호라고 썼다. 심지어 편 자는 쓰지도 않고 뺐다. 이렇게 써놓고는 아마 내가 여기서 두세 군데 틀린 거 같은데 여러분은 이걸 알아차렸나요, 눈이 밝은 독자들은 알아차렸을 텐데 여러분은 어떻냐고 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리고 이 작품은, 「소년행」이라는 시의 전체적인 줄거리를 잘 알지 못하면 앞으로 전개될 이 소설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게 된다. 당연히 우리는 그 소년행의 줄거리를 찾아보아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간단히 그것을 설명하자면 이렇다. 그 시의 내용은 젊은 시절 최국보가 말을 타고 집으로 돌아올 때, 사창가를 지나치게 된다.
사창은 깁(성기게 짠 비단)을 드리운 창을 말하는데, 여성의 방에 흔히 있는 것이다. 즉, 사창가는 자신의 아름다움으로 남자를 유혹해 끌어들이는 술집 접객부나 매음부가 많은 거리를 의미한다.
즉 최국보는 어느 날 그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그 사창가에서 여인들과 정을 통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보니 정신을 차렸고, 거기 오래 있으면 안 되겠다 싶어 바로 그는 그 자리를 떠난다.
그래놓고 자신이 저지른 짓에 대해서, 마침 봄날이고 거기에선 참 특이하게도 내가 탄 말이 내 말을 따르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라 핑계를 댄다. 산호로 만든 채찍을 놓쳤다고 말이 내 말을 듣지 않고 기생 집 앞에 걸음을 멈췄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거기서 놀 수밖에 없었다고 핑계를 댐으로, 그는 양반의 체신을 잃는다.
즉 이는 거리에서 여인과 놀았던 것, 다시 말해 젊은 시절 저지른 일탈을 시로 쓴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최국보가 쓴 시의 내용을 서사적으로 재현한 것이 종생기라는 소설의 내용이다. 어떻게 주인공인 내가 자기 자신을 채찍질하는 산호 채찍을 놓쳐버리는가? 그리고 왜 한 여자의 유혹에 빠져서 망신을 당할 수밖에 없게 되는가? 이런 과정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상은 소설 속에서 그 다음 구성 단계는 어떻게 될 것이라고 끊임없이 암시하는 방식으로 소설을 쓴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소설을 접한 기존 연구자나 독자들은 모두 그 소설 속 등장 인물이 작가 이상 그 자신이라고 판단해버리고 말았다. 이상이 자기 이야기를 이렇게 쓰고 있다고 설명하거나 이해해버린 것이다. 그 소설은 아주 중요한 두 가지 사실을 감추고 있음에도.
그 중 하나는, 소설은 있는 사실 그대로 그려내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주의적 소설적 관점으로는 소설은 삶의 현실을 그럴듯하게 아주 리얼하게 그려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소설은 삶의 현실을 리얼하게 그리지 않는다. 머릿속으로 만들어낸 이야기를 쓰는데, 그것은 전부 작가가 만들어낸 이야기이다. 소설이야말로 허구, 철저하게 작가가 만든 것이다. 그것을 허구적으로 다시 입증해 보이려고 하는 것이 이상의 수법이었다.
이 새로운 소설적 수법은 굉장히 중요한 접근법으로, 이런 유형의 소설 접근법을 메타픽션이라 한다.
메타픽션적 접근이라는 것은, 소설 내에서 소설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등장인물이나 작중 화자가 끊임없이 제시하면서 독자를 이끌리게 하는 접근법이다. 그로 인해 우리는 소설이야말로 만들어진 가구假構의 세계라는 것을 그대로 보고 깨달을 수 있다.
소설은 절대로 있는 현실을 그대로 그려낸 게 아니다. 그것은 작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며, 이상의 소설은 그 진리를 너무나도 당연한 것으로 깔고 이야기를 꾸려가는 것이다.
19세기까지 모든 소설은 현실을 그리는 거라고 간주되었고 꾸며낸 이야기임에도 사람들은 소설의 모든 이야기를 현실 세계와 연관지어 설명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상은 그렇게 하지 않고 자신의 소설을 철저하게 작가가 만들어낸 것, 꾸며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렸다. 바로 그러한 문제의식을 그의 손으로 담아내어 문학을 제작한 것임을 말하고자 했던 것이다.
Arts는 만들어진 것이라는 뜻이다. Artificial(인공적인)의 어근이 바로 저 Art에서 나왔다. 인공적인 것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며,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에는 예술 또한 포함된다. 소설이야말로 작가가 만들어낸 것이고, 당대 현실과 일대일로 마주칠 수 있게 해주는 리얼한 무언가는 아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선언이다. 소설은 작가가 만들어낸 것이며, 만들어냈기 때문에 독자적인 가치가 있다. 소설 자체가 미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 가치는 대단히 자율적이며 다른 어떤 요소에 의해 지배되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을 미적 자율성이라고 한다. 소설은 작가가 만들어낸 예술품이므로 그 자체가 하나의 미적 자율성을 지닌다. 이 미적인 자율성을 지닌 소설을 기존의 리얼리즘으로 해석하려 했던 이들은 전부 그것을 현실 세계와 일대일로 대응시키려 했으나 이상은 그러지 않았다. 철저히 허구적인 것이고 허구적인 것이 허구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자신의 소설을 통해 이상은 보여준 것이다.
이상의 이 소설적인 문법이야말로 문학의 예술적 자율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방법이다. 독자적인 가치를 당당히 인정해 보여야 된다는 것을 강조한 것 또한, 작가가 예술가라는 것을, 그리고 자기가 만들어내는 세계의 창조주라는 것을 당당히 말하는 하나의 선언이었다.
문학은 작가와 관계없이 작가가 어떤 방법을 통해 하나로 완성한 예술품이다. 그 예술품은 작가와도 현실과도 관계없고 독자적인 가치를 지닌다. 그것이 바로 예술의 자율성 선언이자, 이를 이상은 자기 작품을 통해 설명했다. 그 때문에 분석이 까다로운 것이며,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함정에 빠지게 마련이다.
이상 문학을 이해하는 데 한 가지 또 중요한 것은 이상은 한국 근현대 문학사를 통틀어 보아도 시, 소설, 수필 등을 다양하게 쓴 몇 안 되는 문인이라는 사실이다. 『권태』, 『성천기행』 등 명문의 수필을 발표하고, 시에도 능하며 소설도 흥미롭고 산문까지도 잘 쓰는 그런 문필가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재미있게도 이상의 소설은 그 속에서 동원되는 소재와 모티프, 그리고 장면들이 그가 쓴 시나 산문 속에서도 한두 번은 사용했던 그런 소재나 내용들과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 소설을 쓰는 어떤 대목, 이게 시에도 등장하는 대목이 들어와 있고 수필 속에 썼던 대목이 그대로 소설에 들어오기도 한다.
즉, 시와 수필이 소설에 뒤섞인 것이다. 장르를 넘어서며 문학 작품 간에 겹치는 부분이 늘어나고 시와 다르게, 수필과도 다르게 엉뚱한 의미로 새롭게 읽힌다. 따라서 이상 문학을 깊이 있게 이해하려면 시, 소설, 수필을 모두 읽어야 한다. 각각의 작품 속에서 사용된 문학적 모티프가 맥락 속에서 어떻게 변화되고 새 의미를 산출하는가 읽어낼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상의 문학이야말로 그렇게 변화하며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는 맥락 속에 있다는 것은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부분이다.
이러한 두 가지 특징에 기반한 접근법이, 이상 문학을 읽어나갈 때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접근법이 되는 것이다. 이상 문학은 발표 이후로 지금까지 10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수많은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렇게 이상이 관심을 끌었던 이유는, 그만큼 이상 문학이 난해했지만 매력적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권 교수님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그분은 여기에서 한 마디를 덧붙인다. 당신은 한국 근대문학을 연구하며 그것이 서구문학과 일본문학을 모방하고 이식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고, 한국 문학이 뒤처지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기에 열등감을 느꼈노라고. 이전에 실린 글을 그대로 베끼거나 따라한 것이 부끄러웠다고.
하지만 이상은 그 열등감을 너무나도 명쾌하게 깨버렸다. 이상은 독학으로 문학을 공부했고, 기존의 틀을 벗어난 문학을 창작한 것이다. 그는 중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초급대학 과정인 경성고등공업학교, 즉 이과계 대학에 진학해서 건축을 공부했다. 이상은 그 사이에 문학을 책으로든, 학교에서든 제대로 배운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순전히 자신만의 예술적인 흥미와 관심으로 서양문학을 읽고 공부하며 새롭고 많은 것을 독학으로 익혔는데, 그걸 통해 20세기 이후 서구문학이 지향하고 갖춰나간 예술적이고 문학적인 감성을 따라잡아버린 것이다. 1930년대에 발표된 『오감도』, 『날개』와 같은 작품은 그 당시로서는 어느 나라에도 결코 지지 않는 아주 수준 높은 작품이었다.
이상이 나타나기 전까지, 당대의 문인들은 수십 년을 뒤처져 있어 일본과 서양을 뒤따라가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이상이 등장함으로 한국문학은 단박에 서구문학의 당대 감성을 따라잡는 수준으로 올라간 것이다. 이상이 실험했던 시나 소설이 바로 그것을 그대로 보여준다.
즉, 우리는 이상 문학을 기존의 사실주의적인 문학을 감상하는 관점에서 벗어나 모더니즘적 문학이라 명명할 수 있다. 이상 문학은 그런 새로움의 매력과, 새로움에 대한 아주 진지한 추구를 통해 식민지 근대의 후진성을 극복할 가능성을 한국 문학에 열어주었고 그것이 이상 문학이 지니는 가장 큰 문학사적 의의일 것이다.
이하는 옮긴이의 후기로, 이 시리즈를 연재하게 된 이유를 적었습니다. 읽어주시는 분들께는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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