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포스팅은 이상의 집의 요청에 흔쾌히 응해 주신 고(故)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님의 인터뷰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그분께서는 암 투병 끝에 2022년 2월 26일 작고하셨으나 난해하기 짝이 없다고 알려져 있던 이상 문학 연구에 몸을 아끼지 않으셨고, 그것을 이해하고 연구함에 대단히 의미 있는 지침을 마련하여 다른 이들과 나누고자 하셨던 그분의 노력과 뜻은 영원불멸하리라 믿습니다.
그 뜻을 이어 저는 부족한 필력으로나마 이상 문학을 어떻게 감상해야 하는지, 인터뷰로 기록된 그분의 말씀을 정리하고 다듬어 이곳에 기록하였습니다. 원본 인터뷰 내용을 가급적 온전히 담아내었으나 맥락이 어색한 부분은 일부 제외되었음과, 현재는 이상의 집에서 해당 영상이 내려가 이 글에 담겨 있는 내용은 현재 본 타이피에서만 감상하실 수 있음을 밝힙니다.
이상 문학을 감상하시고자 하는 분들께 이 포스팅의 내용이, 그리고 그분의 유지가 부디 잘 전달되길 바랍니다.
수십 년간의 연구가 이어져 왔음에도 이상의 작품은 난해하다는 것이 지금도 통념으로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이상 문학은 사실 그 통념만큼이나 난해하지 않다. 이상 문학은 몇 가지 열쇠만 있으면 해석의 난이도가 급격히 낮아지며, 그 뒤에는 쉽게 감상하고 이해할 수 있는 문학이라 할 수 있다.
그 열쇠 중 첫째는 이상의 소설과 수필에 존재하는 기본적인 시간관념은 ‘순환하는 하루’로, 산문체로 쓰인 그의 작품은 모두 하루 동안에 일어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작품인 《날개》는 여러 밤이 계속되지만, 기본적인 구조는 밤-아침-점심-저녁-밤으로 돌아오는 순환적 구조를 띠고 있다. 어둑한 밤, 자신이 있는 방에서 출발해 한 바퀴를 돌아 제자리로 돌아오는 구성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구성을, 그의 작품을 바탕으로 확인해볼 것이다.
그의 초기 작품 중 《암실의 지도》를 보면 그 순환적 구조가 아주 명확하게 드러나 있다. 주인공은 낮 4시에 잠에 빠져들고, 눈을 뜨면 밤 10시가 된 것을 확인한다. 그리고 그는 켜진 전등을 끄고 밖으로 향한다. 그러다가 새벽이 된다. 그 이후에는 아침으로, 점심으로, 저녁으로 시간이 계속 흐르지만 그는 아무 목표 없이 집을 나가서 그리고 도시를 여기저기 돌아다녔다가 밤중에 다시 돌아오는 하루의 이야기를 이 소설은 담고 있다.
왜 그는 이다지도 의미 없는 야행을 반복하는가? 그것은 발터 벤야민이 이야기한 플라뇌르Flaneur 개념과 관계가 있다. 플라뇌르란 산책자란 뜻으로, 이들은 도시가 생겨난 이래로 목적 없이 도시를 거니는 인간의 한 유형으로 정의된다. 목적 없이 도시를 거니는 사람들은 대개 지식인, 예술인들로 그들은 이러한 플라뇌르의 유보자라고도 일컬어진다. 물론 이 작품에서도, 이상의 생애에서도 주인공이나 이상이 그러한 내용을 읽었는지 우리는 확인할 수 없다. 어디에도 벤야민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 까닭이다.
하지만 암실의 지도에서 주인공은 도시를 목적 없이 소요하면서 관찰한다. 그것은 명백하다. 그는 쇼핑하고자 외출하는 것도 아니고, 사무실에 출근해 사무를 보려고 나서는 것도 아니다. 그저 아침에 빈손으로 나가 온종일을 쏘다니다가 저녁에 들어오는 것이다. 그것이 이상 문학에 녹아 있는 기본적인 서사 구조이다.
물론 소설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반드시 한 바퀴 돌아서, 마치 제자리걸음을 하는 듯한 구조를 보인다. 이것은 의식의 흐름 기법, 또는 내적 독백이라고 정의된다.
소설의 시점과 형식은 3인칭 시점, 또는 전기체나 대화체와 같은 여러 가지 형식이 존재한다. 그중 내적 독백은 혼자서 생각하면서 혼자 말하는 듯이 서술하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Monologue Interieur, 내적 독백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이어령 전 장관의 말씀을 옮기는 나도,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흔히 겪는 일상적인 경험 중 하나다. 남들과 이야기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독백을 하는 것이다. 그걸 그대로 써보면 의식의 흐름 기법이 된다. 그것이 바로 이상이 살아가던 시대에 유행하던 것이었다. Surrealism(초현실주의 기법). 당대 모더니즘 운동에 몸을 담았던 이상은, 그 당시 유입되었던 이 기법을 접하게 된 것이다. 그와 절친한 벗이었던 박태원(구보)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것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 그것은 《율리시스》의 저자인 제임스 조이스로부터 비롯된다. 하루 동안의 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내적 독백. 그것도 가브리엘이나, 모든 사람의 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하루 또는 며칠에 불과한 아주 짧은 시간 만에 풀어내 버린다. 굉장히 분량이 많은 장편 문학인데도 내적 독백으로 인해 소설의 서사시가 외부로 팽창하는 게 아니라, 내면으로 흘러들어갔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내면적 세계에서는 천 년 전으로도 갈 수가 있고, 아득한 미래로도 갈 수가 있고, 시간 개념이 오히려, 마치 녹아내린 끝에 서로 혼유(混油, 기름을 섞는다는 뜻으로, 시간 개념이 서로 섞인다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쓰인 표현으로 보인다)하는 의식의 흐름 기법을 이상이 쓰고자 한 것이다.
《성천 기행》이라는 작품이 있다. 서울에 있다가 성천이라는 시골로 내려가 정지용(영지)에게 편지로 보내는 형식의 연작 수필이다. 서울 토박이었던 이상은 시골에 가서 그곳의 정경을 묘사한다.
향기로운 MJB의 미각을 잊어버린 지도 20여 일이나 됩니다.
여기서 MJB는 경성=당대 서울을 비롯한 여러 도시에 널리 알려진 커피 상표로, 현대로 치면 맥심 커피 정도로 치환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부터 이상의 문체가 두드러진다. ‘서울을 떠난 지도 어언 며칠이 되었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이렇게 표현할 테니까.
이상은 구체적인 생활 감각과 기억과 관련된 파편들을 이어내 MJB의 미각, 그리고 커피 향기라는 식으로 좁히고 구체화하는 기법은 Particularize(무언가를 아주 자세히 다루는 것, 특별한 예시를 드는 것)에 해당한다. 그것은 곧 의식의 Atom(원자,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물질의 최소 단위)이라는 그 극미한 점으로 수렴된다. 그러니 실감 나지 않으면 오히려 그것이 이상한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서술에서 마치 진짜로 사람의 온기, 사람의 냄새와 같은 생의 감각을 실제로 느끼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어둠이 되면 팔봉산이 자리를 갖추어 모습을 드러낸다. 한밤중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로 쓴 뒤, 아침이 되어 날이 밝으면 간밤에 켰던 등잔불이, '아침 됐어요!' 하고 누르는 초인종 단추처럼 보인다. 이렇게 해서 아침을 맞이하고, 봉선화가 피어 있는 집 안뜰의 묘사에서 몇 발짝 걸어 나와서 넓은 논밭으로 간다. 다시 저녁이 되면 동네 학교 마당에 활동사진(영화)을 돌리는 이상의 이야기가 나온다. 시골에는 극장도 뭣도 없다. 그러니 떠돌아다니면서 연사들이 이야기하면 동네 사람들이 '와!'하고 본다. 그리고 집으로 헤어질 때 '아무개야!'하고 부르고는 헤어진다. 그러한 장면들이 연이어 펼쳐져 나온다.
전깃불이라야 자동차 헤드라이트밖에 구경한 적이 없는 그 시골을, 이상은 자신이 살아온 도시와 계속 비교한다. 한 가지 예를 들면 호박이 그러하다. 서울 사람은 웬만해선 호박을 볼 기회가 없다. 서울에서 볼 수 있는 것 중, 그나마 호박과 비슷한 색과 형태를 띠는 것은 럭비공이다. 그래서 이상은 그런 호박을 보면 의식의 흐름에 따라 럭비공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잠깐. 각각 호박과 럭비공을 들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럭비공은 우람한 팔뚝을 둔 젊은 청년의 육체와 근육을 연상하게 한다. 하지만 거꾸로 호박을 생각해 보자. 제사상을 차릴 때, 호박으로 떡을 만드는 일이 있다. 그러면 호박으로 만든 떡 냄새를 맡고 조상의 귀신들이 온다. 젊은이의 우람한 팔뚝과 호박떡 냄새를 맡고 오는 조상들의 귀신. 정반대되는 이미지들이 호박이라고 하는 매체를 통해서 이어지는 것이다.
성천 기행은 전부 그렇게 되어 있다. 서울 사람이었던 이상이 서울에서 체험한 것과, 그런 그가 처음 발견한 시골의 풍경들은 서로 어울리게 된다. 즉 곰이 나왔다고 하면 이상은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곰이 아니라 창경원 동물원에 있는 곰을 생각한다. 그리고 그 곰이 바깥으로 나와 마치 팔봉산으로 올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한편 여치를 비롯한 풀벌레들이 울면 그는 이 울음소리에서 꼭 차표를 찍는 소리, 이발소에서 가위질하는 소리를 떠올린다. 시골에서 물동이를 이고 가는 여성들과, 백화점에서만 파는 화려한 물건을 사러 온 신식 차림을 한 도시의 여성들이 전부 교차가 되는 것이다.
마치, 이중의 렌즈로 겹쳐 찍은 사진처럼 도시와 성천(시골)이 24시간 동안, 밤에서 시작해 활동사진 보는 밤으로 끝나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암실의 지도》도 앞에서 말한 Particularize 기법을 활용한 의식의 흐름 구성을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 다시 《암실의 지도》로 돌아와 보자. 《암실의 지도》라는 제목에서 ‘암실’이라는 것은 그럼 무엇인가? 도시에는 대낮이라도 깜깜한 곳, 즉 암실이 존재한다. 극장이라거나, 또는 교회 등의 집회 장소가 그러하다. 마지막에는 카페, 자기 방까지. 돌아온 이후에도 지나간 밤에 추억의 그 어둠을 간직하고 있는 장소들. 이상은 그것을 암실이라고 불렀다.
의식의 흐름에 따라 생각해 보면 이상의 서사구조는 제임스 조이스처럼 단일한 시간, 그 한순간 속에 영원히 흘러들어오는 의식의 흐름, 즉 그의 내면으로 본 세계를 그려낸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시간이 서로 혼유해 하나가 되어 헷갈릴 수도 있게 마련이다.
《실화》라는 소설에서는 이러하다. 서울에서 연희와 있었던 일들이, 동경에서 C양과 만나 일어나는 일과 하나로 겹치게 된다. 그것은 이상의 내면 의식에서 엄연히 일어난 사건이다. 그가 마주한 한 송이 꽃이, 그 두 사람을 연결함으로 그 둘 사이의 구별이 없어지는 것이다.
모 비평가는 그것은 정신분열증(조현병)이 원인일 것이라 말한다. 하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다. 자세히 분석해 보면 우리는 그것이 아주 정교하고 섬세하게 짜인 서술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서울에서 보낸 며칠이, 동경에서 보낸 며칠과 똑같다. 거리에 나와 꽃을 잃어버린다. 꽃은 여성이다. 따라서 나는 여성을 잃어버렸다. 실화라는 제목, 즉 꽃을 잃었다는 의미는 이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서울에서의 연인이었던 연희와 헤어지는 것. 그리고 동경의 C양과 만났다 헤어지는 것. 그것을 그대로 이중 촬영, 즉 오버랩함으로써 서술한 것이다. 이렇게 특정 소재가 매개로 작용하여 서울에서 동경으로 의식이 넘어가는 모습이 작중에서 분명하게 서술되고 있다.
즉 이상 문학의 전체적인 서사 구조는 군더더기를 붙여가며 해석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전체적인 구조를 보면 단번에 답이 나온다. 뉴턴이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온 우주에 해당하는 만유인력의 법칙을 증명했듯이, 이 또한 그와 마찬가지다. 단순한 하나의 사실을 가지고 복잡한 현실을 추리해서 구조화하는 것.
이상은 자기 작품들에서 그 서사를 면밀하게 구성하고자 했고, 그 노력으로 인해 그 서사는 아주 치밀하게 구성되어 나올 수 있었다. 그런데 한국의 서사 문학에 가장 부족한 것이 바로 구성 능력이다. 구조화의 결핍이다. 그러니까 이야기의 흐름이 명확하고 치밀하지 않고, 우연적이고 기이한 전개를 바탕으로 마치 신화, 전설, 설화처럼 흩어져서 이야기가 나가는 것이다.
시 또한 그러하다. 그의 시에서도 우리는 이러한 서사 구조를 발견할 수 있다.
《오감도》를 비롯한 몇 가지 시로 그것을 읽어내 보자. 《오감도》 제1호와 2호. 13인의 아이가 도로를 질주하오. 이것이 쭉 써 내려져 간다.
사람들은 저것들에 의미를 부여하려 한다. 13인이면 13도냐? 예수의 13사도냐? 무서운 아이는 누구고, 무서워하는 아이는 뭐냐? 도로를 질주한다에서 도로의 의미는 뭐냐?
하지만 그것은 잘못되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여러 가지를 붙여가며 해석할 필요 자체가 없다는 것이다. 핵심적인, 전체적인 구조를 보아야 한다. 오감도도 그러하다. 제1호와 제2호. 오감도만 떼어 놓고 보아서는 안 된다. 오감도라는 게 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시 제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오감도烏瞰圖. 까마귀가 내려다본 모습이다. 까마귀는 언뜻 보면 눈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새 조(鳥)에서 가로획 하나가 빠졌다. 가로획 하나가 더해진 원문은 바로 조감도(鳥瞰圖)이다. 건축학에서 흔히 쓰이는 용어로, 마치 드론으로 찍은 듯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상태의 그림이나 지도를 의미한다.
조감도의 원어는 bird's eye view이다. 이상은 이것을 crow’s eye view, 오감도로 바꾼 것이다. 왜냐하면 까마귀는 지능과 관찰력이 아주 우수한 조류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시골에서도 나무 위에서 사람들이 노는 것을 구경하는 까마귀를 볼 수 있다. 그들이 나무에서, 하늘에서 인간들을 쭉 내려다보는 것. 인간 세계를 조감한 것이다. 그런데 이 또한 그냥 내려다본 것이 아니다. 우리는 까마귀가 지닌 음산한 이미지 또한 고려하여 작품을 이해해야 한다.
아까 예시로 든 MJB를 떠올려 보자. 커피라고 하지 않고 왜 MJB라고 했는가. 커피 맛이라고 하지 않고, 커피 향이라고 하지 않고 왜 MJB의 미각, 향기라고 했는가. 그 맥락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조감도를 더 구체화하면 하늘 위에서 우리가 인간 전체를 내려다보는 모습이다. 행복한 그림일까? 아니다. 까마귀는 불길함과 죽음을 연상시킨다. 썩은 고기를 먹기 때문이다. 절대로 긍정적인 이미지가 아니다. 결코 평화의 상징 비둘기와 같은 의미로는 이해할 수 없다. 그런 까마귀의 눈으로 내려다본 1930년대의 이상이 살던 도시, 그리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그려내고자 시도한 것이다. 전체적인 것을 그려내고자 시도한 것이다.
그래서 제1호 13인의 아해가 도로를 질주하오. 이것의 의미는 몰라도 된다. 이상은 여기에 애당초 아무 의미도 부여하지 않았다. 어린애 13명이 도로를 질주하면서 횡대로(옆으로 나란히), 일렬로 쭉 달려나간다. 2호는 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의… 아예 행이 1인의아이도2인의아이도 이렇게 쭉 이어 써지고 있다. 시제1호는 세로로1인의2인의4인의… 이러한 형태로, 쭉 옆으로 퍼져 있다.
2호는 종적(아래로 쭉 이어쓰기)으로, 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가… 이렇게 띄어쓰기도 하지 않고 빗발치듯 내려온다.
세대의 교체와 횡적/종적 구조를 기준으로 작품을 감상하면 바로 답이 나온다.
1: 아이 세대=신세대들의 공간적인 축
2: 아버지의 아버지, 조상 세대=구세대의 시간적인 축
공간과 시간, 즉 시공간 사이를 넘어 세대 너머 조상들의 계보로 이어지는 전통적인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구조를 취하는 것이다. 13인의 아이들이 계속 길거리에 뛰어다님으로 인해서.
우리의 인생을 두 토막으로 나누어 우리가 내재하고 있는 사회적 세대, 그것을 실시간으로 겪고 있는 오늘날의 우리, 우리 몸속을 관류하는 세대의 역행은 끝내 단군신화까지 거슬러 간다. 그 피의 흐름 속, 그 교차점에 우리가 놓여 있고 그것을 이 사회는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공간을 대조함으로써 쉽게 알 수 있다. 공간과 시간은 13인의 아해 그 이상으로 끝없이 거슬러 올라간다. 아버지를 할머니로, 외할머니로 바꾸면 그것은 미토콘드리아로, 미토콘드리아 이브(현생 인류가 지닌 미토콘드리아의 기원이 되는 유전자를 보유한 최초의 여성)로 쭉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그 13인의 아해를 쭉 나열하면, 일본인, 중국인, 아프간… 온갖 다양한 인종들이 나온다. 그들 중에는 정말 무서운 아이도 있고, 무서워하는 아이도 있다. 왜? 그들은 경쟁 관계에 놓인 까닭이다. 같이 뛰어도 누가 누군지, 옆의 아이는 경쟁상대인 것만 같고, 달리지 않으면 뒤처질 것만 같다. 이런 인간관계를 그는 질주하는 것으로 본 것이다. 다시 말해 경쟁 관계가 질주를 유발한다. 맹목적인 질주를 하는 우리가 바로 그 13인의 아해인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 우리도 결국 부모 세대가 되는 것이다.
이상은 난해한 것을 이토록 너무나도 쉽고 뻔한 구조로 말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이상의 매력이고, 그의 문학을 파고드는 이들에게는 이상의 약점으로 비치는 부분인 것이다. 이외에도 이상 문학을 감상하고 이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몇 가지 정보를 더 설명하고 마무리하도록 하겠다.
이상의 필명인 이상은 중의적인 단어이다. 以上, 異狀, 李箱. 이중 李는 오얏 리(이)로, 성씨로 쓰이는 한자이다. 그는 자신의 필명으로 제 성씨를 갈아버린 것이다(당대에는 이러한 것이 심각한 패륜 행위로 인식되었다). 이는 자신의 핏줄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심리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그는 13인의 아해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분신 또는 자식과도 같은 작품을 창작할 때도, 13인의 아해와 마찬가지로 기존의 문학적 틀을 탈피하고자 했다. 인간 세계는 사회와 역사로 나뉘며, 이는 다시금 사회철학과 역사철학으로 나뉜다. 이것이 헤겔이 말한 철학이다. 《오감도》 1호는 사회를, 2호는 역사를 다루고 있다. 이상은 그 내용을 시로써 풀어간 것이다.
이것을 조금 더 쉬운 예로 설명하자면 이러하다.
이상은 전등불의 이미지를 1/w으로 묘사했다. 이것은 그저 텅스텐 전구의 모습을 문자로 이미지화해서 나타낸 것이다. 수학적 기호와 같이 의미 있는 기호를 문학적으로 바꿔, 한정된 미디어를 새로운 의미 또는 이미지로 확장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지주외시》에서 거미의 한자어조차 변용했다. 거미는 한자어로 蜘蛛라고 쓴다. 그러나 그는 옛말을 빌려 鼅鼄라고 썼다. 이편이 더 거미처럼 보이는 모양인 까닭이다.
한편 이상의 시 중 《차8씨의 출발》이라는 것이 있다. ‘차8씨’의 원 표기를 살피면 ‘且8氏’이다. 8은 한자로 八이라 쓴다. 且+八=具(성씨 구), 즉 차8씨는 구본웅을 의미함을 알 수 있다.
그는 이러한 몇 가지 은유를 써서 코드 화합으로 시각화하고, 이중 삼중으로 의미를 바꿈으로써 구본웅을 시적으로 묘사했다. 그것이 바로 《차8씨의 출발》이다. 구본웅은 곱추이기 때문에 눈사람과 닮은 모습이라 8이라는 숫자로 시각화했고, 거기에 모자를 씌운 것이 바로 차8씨라는 인물인 것이다.
이상은 이외에도 시니피앙(개념을 나타내는 언어)과 시니피에(시니피앙으로 드러나는 의미) 개념 또한 자신의 문학에 녹여내었다. 애브노멀한 이상異常, 이 이상以上, 이상理想, 이상異狀 . 이 여러 가지 이상은 한자 음이 같지만 뜻은 모두 다르다. 이러한 것을 가지고 노는 걸 시니피앙 놀이라고 하며, 그는 이것을 자신의 작품에 가감없이 나타낸 것이다.
일례로,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모두 ‘이상’이라는 필명의 유래에 대한 이야기를 한 번쯤은 찾아본 적이 있을 것이다. 젊은 나이에 건축 노가다판 현장감독으로 찾아간 김해경(이상의 본명)의 성씨가 이씨인 줄 알고 인부가 그를 이상이라 불렀다는 일화로 그가 자신의 필명을 이상으로 정했다는 것은 사실 잘못 알려진 이야기이다.
이미 그는 경성고등공업학교 시절부터 이상이라는 사인을 썼기 때문이다. 그가 이 이상이라는 단어를 마음에 들어 하여 자신의 필명으로 삼은 까닭은, 한자로는 음이 같으나 뜻이 다른 단어를 가지고 노는 언어유희를 노린 것이었다.
이토록 난해해 보이지만 비밀을 푸는 열쇠를 갖고 있다면 아주 쉽게 풀리는 것. 그게 바로 이상의 시이다. 황홀하고 놀랍고 섬세한 20대, 채 서른이 되기도 전에 죽은 천재 이상이 생각한 인간의 모습. 이 글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그의 가치관과 사고방식, 그리고 그의 작품을 우리도 함께 알 수 있는 것이다.
메타포를 이해하고, 문학적 구조와 형태를 이해하고, 한자든 영어든 우리나라 말이든 수학적 기호든 매체를 자유롭게 이용해서 전부 표현 매체로 삼아버리는 미디어와 문자의 확충을 이상은 자신의 작품에 녹여내었다. 그것을 이해한다면 이상은 절대 이상한 작가가 아니라, 친근하고 재밌고 매력적이며 흡인력 있는 청년 작가로서 우리들 곁에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