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고난과 역경에 직면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생물의 근본적인 존재 의의인 까닭입니다. 그리고 이왕 살 거 행복하게 살기로 마음먹는다면, 그것이 가장 이상적인 결론 중 하나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행복이란 건 무엇일까요. 내 안위가 보장되는 삶? 누군가에게는 그럴지도 모릅니다. 돈을 많이 버는 삶? 누군가에게는 그러할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는 삶? 누군가는 그렇다고 이야기하겠죠.
이렇듯 행복은 한 가지 의미만으로 정의할 수 없습니다. 행복의 개념은 사람마다 다르니까요. 그렇기에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겁니다. '행복한 삶'이란, '부끄럼 없는 삶'이라고요. 그렇습니다. '한국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시인'이라는 별명을 지닌 윤동주 시인이 그렇게 말한 이들 중 한 명입니다.
저 또한 그의 사상에 깊게 동조하고 공감하였고, 그로 인해 저는 입버릇처럼 '떳떳하게 살고 싶다'는 말을 읊조리게 되었습니다. '이상적 일상에 대한 주관적 고찰' 시리즈에 이 해석 시리즈를 기고하는 것 또한 그런 까닭입니다. 산다는 것은 일상을 영위하는 것이요, 떳떳하게 살고 싶다는 것은 이상적인 일상을 살아가고자 끊임없이 노력한다는 뜻이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한 번 더 강조하겠습니다.
부끄럽지 않게, 떳떳하게 살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주제의식을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작품이 바로 윤동주 시인의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詩』의 서시로 수록된 이 작품이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좀 더 효과적으로 전하고자, 시 원문과 그에 대한 해석을 주석으로 달아 가져왔습니다. 이미지에 정리된 내용을 읽으신 뒤에 하단의 내용을 읽어주시기를 권장합니다.
서시는 이미지에서도 언급했듯이, 원래는 서문 대신 책 첫머리에 올리는 시입니다. 이 시가 워낙 유명해졌다 보니 서시의 사전적 정의에도 윤동주 시인의 시라는 언급이 추가될 정도가 되었지만요.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핵심이 되는 내용이 앞에 와야 합니다. 다시 말해, 해당 시집의 서시로 본 시가 채택된 것은 시집에 수록된 모든 시들을 포괄하는 주제 의식이 이 시에 함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기'라는 것이죠. 윤동주 시인은 저항하기 위해 시를 썼고, 수록된 시들 중 저항의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시조차도 이 주제의식에 포괄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습니다.
그럼 여기에서 조금 더 쪼개어 보겠습니다. '식민지', '지식인',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기'. 시의 전개와 이어지는 부분부터 설명해 보자면,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기'란 '하늘을 우러르는 삶'과 이어집니다. 자, 여기서 부끄럼이란 수치심과 죄책감 중 어느 쪽에 더 가까울까요?
어느 쪽을 생각하셨든, 둘 다 맞는 답입니다. 본질을 공유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그 본질은 무엇일까요? 간단합니다. 그 본질은 '양심'으로, '선한 마음'으로, '도덕심'으로 이어집니다. 그렇기에 그 본질을 견주는 기준인 하늘은 보편타당한 도덕 법칙이라고 볼 수 있겠죠.
한편 하늘을 도덕률로 여긴 이는 윤동주 시인뿐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적잖은 유학자들, 다시 말해 수많은 지식인들이 그렇게 생각했고, 그 생각을 글로 남겼어요. 공자와 맹자가 바로 그렇게 생각한 유학자들의 대표격 인물이죠.
명동촌*에서 나고 자라 그곳에서 생애의 절반을 보낸 윤동주는 그런 성현들의 가르침을 토대로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린 시절부터 그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식민지로 전락한 조국 광복을 위한 헌신. 그것이야말로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의 지식인으로서 너무나도 당연하게 행해야 할 미덕이자, 앞서 말한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기'를 실천하는 핵심이었습니다.
*명동촌에 대한 설명
간도와 연해주 지역의 조선인 정착촌 중 항일 민족 운동의 요람이라 불려온 곳. 이곳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https://www.okpedia.kr/Contents/ContentsView?contentsId=GC05300011&localCode=krcn 참고
그리고 그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아는 것에 책임을 지고 그것을 꾸준히 행동으로 옮기는 삶. 그것이 바로 이상적인 일상이자 우리의 삶 그 자체가 될 것입니다.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지만, 꾸준한 것이 가장 어렵고 힘든 것이니까요.
자, 그럼 이제는 시로 돌아가서 왜 시집의 제목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詩』가 되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시에 표시한 소재들만 봐도 알 수 있듯, 시집의 제목은 그 소재들로 재구성된 것입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詩』는 윤동주 시인의 유고 시집(생전에 써서 남긴, 죽은 작가의 시들을 모아 출판사 등에서 엮어 낸 책)이며, 이는 다시 말해 저 시집의 제목은 윤동주 시인이 짓지 않았다는 뜻이죠. 사실 윤동주 시인은 이 시집을 엮어냈을 때 시집 제목을 병원病院이라고 지으려 했습니다. 당시 그가 본 세상이 온통 환자투성이라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후배 정병욱의 회고 中)
그럼 왜 저 시를 쓰지도 않은 이들이 저 소재들을 시집의 제목으로 끌어다 썼는가? 시인의 살아생전 뜻을 따르지 않고 제목을 바꾸어 출간한 것은 그의 원래 의도를 왜곡하고 흐리는 행동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타당한 비판입니다. 사실적인 근거와 논리적인 추론을 바탕으로 이끌어낸 것이니까요.
하지만 다들 아시는 것처럼 해석에는 정답이란 것이 없습니다. 오답은 있지만요(작품에서 구체적으로 명시되거나 언급된 적이 없는 무언가를 근거로 한 해석에서 흔히 드러나는 오류입니다). 그리고 시집의 제목이 저렇게 정해진 것은, 적어도 오답인 해석을 바탕으로 한 결과는 아닙니다. 그럼 그 이유를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늘은 도덕입니다. 바람은 시련이고요. 별은 시대상을 고려하면 희망과 소망, 더 구체화한다면 조국 광복에의 의지를 의미합니다. 즉 윤동주 시인은 도덕(이상)을 바라보며 살고자 했으나 그를 괴롭게 한 시련으로 인해 이상으로 나아가기 힘든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참, 여기에서 시련은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 그 자체는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을 나약하게 만드는 여러 사건들이나 소재들을 '바람'으로 상징화했다고 보는 편이 정확하겠죠. 잎새에 이는 바람은 그다지 강한 것이 아니니까요. 강한 바람은 잎새도 다 날려버리죠. 즉, 윤동주 시인은 오히려 자신의 나약함을 이 대목에서 드러내고 성찰을 통해 극복하고자 했습니다.
그가 '-아야지'라는 어조를 그 다음 구절에서 쓴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문제 상황을 직면했다면 그에 대한 해결책을 도출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니까요. 그리고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죽어가는 모든 것을 사랑하겠노라고 다짐하는 것이 바로 그 해결책이었습니다. 희망과 소망, 조국 광복을 부르짖는 의지로써 인류애를 실현하고 고통받는 조선 백성들의 아픔을 끌어안고자 한 것이 말이죠.
끝내 그는 그 모든 아픔을 끌어안은 채로, 자신이 갈 길을 가겠다고 맹세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가 결론내린 식민지 지식인으로서의 책임이었던 까닭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그 시련이 잦아든 것은 아닙니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고 한 것은, 어젯밤에도, 오늘 밤에도, 그리고 그 다음 날 밤에도. 그 의지가 흔들릴 일이 셀 수 없이 많을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길을 감에 후회나 미련, 자책, 원망 따위의 감정을 추호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저 자신이 갈 길을 묵묵히 갈 뿐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시집의 제목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詩』인 까닭이요, 떳떳하게 살고자 하는 이가 윤동주 시인을 본받아야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자신의 앎에 책임을 지고 그것을 행동으로 꾸준히 옮겨라. 그 무슨 일을 맞닥뜨린다고 할지라도.
윤동주 시인은 그러한 신념으로 이 시를 비롯한 수많은 시들을 썼고, 그 시들을 엮어 시집을 내고자 했습니다. 그 자세가 일제강점기와 마찬가지로, 혹은 그 이상으로 어지러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인도할 등불과도 같은 본보기가 되어주겠죠.
오늘의 글은 여기까지입니다. 아마 당분간은 시와 해석을 엮어 글을 쓰게 될 것 같아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부디 여러분이 맞이할 앞날들이, 부끄럽지 않은 나날로 기억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